복잡한 철학, 논리, 구도, 신앙, 과정, 희생, 고행, 이 모든 형식과 형태를 넘어서 단순 명료히 "미술감상을 통해 견성을 체험하는 미술" 그것이 시각을 통해 견성을 표현하는 시각견성의 본질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이듯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을 미술로 표현해 관람하고 감상하는 것으로 사고하는 마음에서 벗어나 직관적으로 깨달음을 접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의 진리체험입니다.
[시각견성]은 의식상승의 과정을 시각화하여 형상너머의 실체를 표현합니다.
마음의 본질과 업장의 실체, 에고의 약점과 아상의 한계, 고통의 뿌리와 무지와 미망의 본질, 어둠의 본체와 업장의 작용방식, 어둠을 환영하고 본성을 발견하는 기술과 방법, 자가구원의 원리와 해방의 열쇠, 나얼의 각성과 본성의 해방, 말로 설명될 수 없는 형상너머의 실체와 진리의 본질을 미술로 표현하였습니다.
트랜스 아트 파트 1 시각견성 시리즈는 '깨달음과 깨어남'의 순차적인 과정을 역동적으로 시각화해 관조자가 영적 초월의 과정: 에고의 실체와 부작용, 의식의 상승과 해방을 간접 체험할 수 있도록 표현합니다.
그 기승전결의 순서는 '차원의 각성', '깨어남의 서막', '본성의 발견', '견성의 광명', '에고 인식', '어둠의 업장', '자아의 초양자적 실체', '의식시냅스의 각성', '자아해방', '초탈', 그리고 '초탈인지'로 이어집니다.
한얼정신문화예술 작품의 본질은 종교적 이념적 사상이 아니며 작품 속의 본질은 작가의 사고하는 마음 너머, 근원인 본성에서 나온 것임을 명확히 합니다.
그리고 작가에 의하면, 초탈미술 작품의 원천이 어디에서 왔는지 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초탈인식, 즉 당신이 작품을 어떻게 인식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로지 관객이 사고하는 마음의 작용에서 넘어설 때 관객은 초탈미술의 원천, 작품의 형상 너머에 내재된 트랜스아트의 정수를 알 수 있을 것이며 그 곳에서 관객과 작가의 의식은 조우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곳은 바로 견성의 자리, 우리의 본성을 발견하는 자리입니다.
작가는 자신이 의미하는 본성의 발견을 의미하는 견성이 우리의 마음과 고정관념이 만들어 낸 것처럼 그렇게 어려운 것이 아니며 혹독한 수행과 고행 없이도 의식의 전환을 통해 사고하는 마음으로부터 벗어날 때 만날 수 있는 자연스럽고 근원적인 의식의 상태이자 우리 모두가 의식진화의 시대에 체험하게 될 자연스러운 의식상승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자신 또한 이러한 과정을 거쳐 자신의 본 모습을 점점 찾아가며 자신의 미술에 표현하는 중이라고 합니다.
미술은 다양한 방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예술적 영감과 감정적 깨어남을 선사해 왔으나 미술이 영적 초월을 위한 직접적인 수단으로 사용되어 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작가는 상대적 수단으로서 만이 아니라 미술의 근본 목적 자체가 사실은 미술의 원천이자 아름다움의 근원인 우리의 본성에 이르는 길을 보여 줘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것은 마음(업과 습으로 형성된 자아의 멘탈 시냅스, 에고의 정신 구조)이 형성되기 이전에 당신의 본존(순수의식의 본래 존재상태)을 말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이 형상너머의 예술적 영감, 창조 이데아가 생성 된 곳인 무한가능태의 의식차원이며 그곳은 애초에 우리가 아름다움을 알 수 있게 하는 우리의 본성이자 순수의식의 상태를 말합니다.
초탈 미술이 혁신적이었던 첫 번째 이유는, 그의 작품 자체가 생각과 형상너머의 본성, 무한가능태의 순수의식의 영역에서 영감을 얻어 창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미술을 관조하는 새로운 접근 방식을 제안했습니다. 그것은 초탈인지: 일상의 마음을 '초'월한 '탈'사고적인 새로운 방식의 의식전환법으로 에고의식을 초월한 순수의식으로 미술을 관조하는 기술입니다.
초탈 미술은 형상만이 아닌 형상 너머 미술의 본질을 관조하는 법을 제의합니다.
물체에서 공간으로, 미술의 형상에서 미술의 근원으로, 형상에서 형상너머로, 발현된 형상에서 형상화 되기 전 근원으로 의식의 초점을 전환함으로 인해 인식의 차원은 전환됩니다.
‘이해하려는 사고의 충동’으로부터 '순수한 인식'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마음의 습성’으로부터 ‘순수의식’으로 전환되는 것입니다.
생각하려는 (사고하는 마음을 사용해 미술을 분석하고 판단하고 비교하고 정신적으로 분류하고 이해하려는) 집착과 충동을 내려 놓을 때 사고의 작용은 힘을 잃고 길들여 지지 않은 의식의 상태, 즉 순수인식 그 자체로 전환될 수 있습니다:
초탈미술은 초탈의식으로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미술을 관조하며 형상너머에 대한 집중이 우리의 인식을 투명하게 전환 할 때 우리는 형상을 둘러싸고 있던 형상너머의 본질을 지각하고 깨닫게 된다: 아마 그 자리에서 깊은 평화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 고요하고 명료한 마음이 자리합니다.
이해하려는 집착을 내려 놓음으로써 ‘사고하려는 마음의 습성과 충동’은 해방될 수 있습니다.
비로소 당신은 에고 (사고하는 마음)의 완전한 곡해로부터 벗어나 왜곡된 관념의 필터를 거치지 않고 미술의 형상과 형상 너머의 원천인 본성의 창조영감을 동시에 자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마음은 ‘이해하고 판단하려는 습성’으로 인해 완전히 변형된 인식의 필터를 벗고 ‘명료하게 집중된 인식의 상태’로 전환 될 수 있습니다.
비록 짧은 순간일지언정 미술을 통해서 작가와 인식자는 에고의 형상 너머의 자리에서 조우할 수 있습니다.
자아의 사고하는 마음이 우리의 본성을 대신하기 이전의 맑고 밝은 의식상태.
그것은 우리가 일상의 사고하는 마음, 에고에서 해방될 때 가능한 마음 너머의 자리, 우리 본성의 발견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각견성의 핵심이며 자아해방의 정수입니다.
한얼정신문화예술은 종교와 미술의 진화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를 제시합니다: 미술은 전통적인 형태의 신앙과 종교적 형상을 '초'월하고 체제나 시스템도 아닌 ‘탈'종교적이기에 한얼교가 시도한 한얼정신 문화예술은 [초탈종교]인 동시에 [초탈미술]이라 불릴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전례 없는 종교와 미술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변화의 화두를 동시에 제시한 것입니다.